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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델 (Emile Antoine Bourdelle) 展 본문

문화이야기/그림이야기

부르델 (Emile Antoine Bourdelle) 展

바람다당 2011. 10. 9. 00:46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부르델 展"에 다녀왔다.
  부르델은 로댕의 인정을 받아 그의 제자로 들어가 사사를 받았다고 한다.
  예전 로댕갤러리에서 "로댕展"이 열렸을 때 부르델과 로댕 작품의 차이점에 관해 흥미를 가졌던 기억이 있어
 기대를 안고 부르델 展에 다녀왔다.

활을 당기는 헤라클래스 - 전시장 입구의 모사품

(전시관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이하 사진 출처는 인터넷)

전시장에서 나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박혔던 것은 조각에 대한 그의 신념이다.

(이 글은 제 1전시실 정면에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조각에는 인상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빛과 그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윤곽으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나 윤곽, 모든 게 집대성된 윤곽으로 나아가야 한다.”

- 부르델 (Emile Antoine Bourdelle)

 

이 보다 더 그의 작품관을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부르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댕의 작품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로댕의 작품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하여 인상주의의 변용이라서 해석될 정도로 조각에 감정을 이입했다.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연출된 몸짓을 통해 극대화된 육체의 모습은 조각을 통해 최대한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로댕의 유명한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근육을 최대한 인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과장되고 힘든 자세로 앉아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도된 울퉁불퉁한 근육이 빛과 그림자에 의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부르델은 로댕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조각은 인상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윤곽이었다.

"아폴론 두상" -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로댕과 다른 독립적인 작품관을 확립했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점이 두 사람의 작품의 차이를 가져다 준다.

로댕은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섬세한 조각을 한 반면, 부르델은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해 상대적으로 거칠면서 강인한 조각을 했다.

또한 로댕은 조각이 건축의 장식적인 요소로 한정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고자 노력한 반면, 부르댕은 조각을 거친 덩어리로서 이해함으로써 조각에 건축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한니발 최초의 승리"

한니발 최초의 승리는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잘 연출된 동작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극도의 조형미를 만들어 낸다.

거대한 매가 날개를 펴고 있고, 한니발은 그 매의 목을 붙잡고 환희의 웃음을 짓고 있는데,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환희에 찬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

몽토방의 전사(위대한 전사)

이에 반해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후기에는 확실히 작품의 경향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체의 비례와 근육의 세밀한 표현에 신경을 쓴 전작들과 달리 거칠로 강렬한 표현을 사용했다.

과감하게 강조된 손과 근육, 극도로 단순화된 도구(칼)를 표현함으로서 하나의 윤곽이 된 거대한 덩어리를 빚어냈다.

그의 사진 뒤로 작업중인 몽토방의 전사 작품이 보인다.

"작업중인 여류 조각가"

"과일"

"과일"에서 그는 여성의 육체를 관능적으로 잘 표현했다.

또한 과일 자체가 의미하는 생명력과 탐스러움이 여성상과 잘 부합되고 있다.

"활을 당기는 헤라클레스 습작"

거대한 활을 당기는 헤라클레스를 만들기 위해 수 많은 습작을 남겼다.

활이 없는 모습, 활이 있는 모습, 크기가 작은 것 부터 거대한 것 까지

수 많은 습작들과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 명작으로 불리우는 활을 당기는 헤라클래스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도 다소 과장된 손과 근육, 그리고 근육을 표현하기 위해 연출된 자세가 옅보인다.

거친 바위를 덩어리로 붙여 놓은 듯한 과감한 표현과, 표정의 세밀한 묘사가 놀랍다.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 1910년, 청동, 84 X 24 X 26 cm, 프랑스 부르델 미술관.

하지만 나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것은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더 선명한 표정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 작품은 초기 작품이 아님에도 세밀한 묘사와 비례가 이루어져있다.

특히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라는 그 유명한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다른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묘사가 세밀하고 아름답다.

오히려 서서히 월계수로 변해가는 다프네의 환희에 찬 모습은 상기된 유두와 격정에 찬 표정으로 인해 성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농염하다. 욕정을 이기지 못해 다프네에게 손을 건네 결국 월계수 나무로 변하는 이 신화를 표현하기 위해 다프네 뒤 왼쪽 다리 아래 그녀를 붙들고 있는 아폴론의 모습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인 점은 다프네의 표정에 대한 묘사이다.

신화적인 모티브 속에 감쳐놓은 작가의 (외설적)욕망이랄까?

과거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의도가 다른 제품들이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에로티시즘인데, 오르가슴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과 같은 기쁨에 가득찬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이 예술적 감수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당대의 시대상황은 이러한 작가의 의지를 외설적으로만 인식하였기에, (혹은 이를 용인할 수 있는 시대상황이 아니었기에) 작가들은 신화나 성화에 이러한 모습을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라는 신화적 모티브를 따온 만든 다른 작가들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이런 차이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신화의 비극은 에로스로 부터 사랑의 화살을 맞은 아폴론과 혐오의 화살을 맞은 다프네로 부터 시작된다. 아폴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아름다운 다프네와, 딸이 욕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결국 다프네를 월계수로 만들기로 한다. 그러한 욕망의 숨가쁜 술래잡기의 결말은 결국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해야 하는 비극인 것이다.

베르니니의 작품 -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

이러한 비극의 순간, 다른 작가들이 절망과 탄식의 다프네를 그려냈음은 당연하다. (上)

하지만, 부르델은 절망과 탄식이 아닌 격정과 환희에 찬 다프네를 그려넣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향한 또 다른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에 대한 반감이었을까?

조각과 달리 청동 주물 작품에 그러한 세밀한 표정과 감성을 표현해낸 부르델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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